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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MZ 사내 커플의 혼전 계약서

마음백과사전 2025. 6. 7.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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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MZ 사내 커플의 혼전 계약서

서아람 변호사 2025.05.28.

 

커플링을 나눠 낀 선남선녀 커플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결혼을 앞둔 이들이 웨딩 플래너가 아닌 변호사를 찾아온 이유는 ‘혼전 계약’을 위해서였다. 대기업 사내 커플이라는 이들은 초안도 만들어 왔다.

 

“우리나라 법에서는 ‘혼전 계약서’라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긴 합니다만.”

 

사실 혼전 계약서는 미국 법 개념이고, 우리나라 법에서 올바른 용어는 ‘부부 재산 계약서’다. 문자 그대로 재산에 관한 내용을, 주로 결혼 전 각자가 가진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분할지에 대한 것만을 정하는 계약이다. 이혼 시 재산 분할이나 양육권 분담에 대한 내용도 적을 수는 있으나, 추후 법원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효력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계약 위반한 쪽은 이혼 소송이나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불리해진다면서요.”

 

MZ 커플은 판례까지 샅샅이 찾아보고 왔다. 초안에 적힌 건 단순히 ‘집값 반반, 가사 반반, 명절에는 친정과 시가를 번갈아 먼저 가기’ 정도의 애교스러운 합의 사항이 아니었다.

 

신혼집은 전세 대출로 마련하고, 무주택자인 예비 신부 명의로 대출받되 예비 신랑이 연대보증, 결혼식 및 신혼여행 비용 양가 지원 포함 50%씩, 예물 예단 생략, 예비 신랑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대절 및 간식비는 시가에서 부담....

 

가사는 누가 뭘 해야 하는지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자녀는 결혼하고 3년 이상 신혼 기간을 보낸 뒤 하나만 낳는다는 것과, 출산 후 6개월은 예비 신부가, 그 이후 6개월은 예비 신랑이 육아 휴직을 내고 아이를 돌본다는 조항도 있었다. 분량은 A4 용지 3장.

 

“이건 돈 낭비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이 계약서는 구멍투성이가 될 겁니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목적은, 각자의 의무와 권리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향후 생길지 모르는 분쟁을 예방하는 것이다. 발생하리라 예상되는 모든 상황을 상정하여 해결책을 명확히 제시하는 게 훌륭한 계약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변수가 너무 많다.

 

“아이를 하나 낳는다고 하셨는데 쌍둥이가 생기면 어떡하죠? 반대로 난임이면? 시험관 비용은?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래서 한 명은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부모님 중 한 분이 편찮으셔서 간병인이 필요해지면요? 암에 걸리면?”

 

“....”

 

“공동 생활비 납부 의무는 자동으로 면제되는지 연기되는지, 지연 이자는 붙는지, 양가 경조사 참석 및 명절 노동에 대해 적어두셨는데 위반 시 위약금이 있는지, 여기 특약 사항을 보면 외모 및 몸매 관리 의무가 있는데, 갑상선 기능 항진증으로 살이 찌거나, 급성 탈모가 오면....”

 

당장 생각나는 것만 읊었는데도, 커플은 당황했다.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들은 더 고민해 보겠다면서 돌아갔고, 다시 찾아오진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결혼은 서로 조건을 따져야 하는 비즈니스다. 하지만 조건‘만’ 따질 거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상품성 좋은 연금저축이나 하는 게 낫다. 희한하게도 결혼이란 제도는, 어떻게 살든 양쪽 다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니. ‘이 사람이라면 내가 손해 좀 봐도 괜찮다는 너그러운 마음, 나아가 기꺼이 손해를 보겠다는 패기 정도가 아니면, 한 사람과 백년해로하겠다는 정신 나간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종종 궁금해진다. 그 커플은 무사히 식장에 입장했을까. 그 계약서는 찢어 버렸을까, 아니면 도장을 찍었을까.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5/28/5ZLSLXGN4ZBDROQKOJPTZGVN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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