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남편
… 75년 만에 아내와 현충원서 만나다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 통해 실종 유창수씨 위패 현충원서 찾아
지난달 숨진 아내와 함께 안장
김혜민 기자 2025.06.07.

현충일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75년 만에 찾은 유경희씨의 아내 손대영씨가 시아버지를 추모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두 분 같이 재밌게 지내고 계시죠?”
5일 오후 3시 아내 손대영씨와 함께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제2충혼당을 찾은 유경희(75)씨는 봉안실 유리를 한참 어루만졌다. 1950년 6·25 전쟁 때 전사한 부친 유창수씨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지난달 유씨 모친 황정숙씨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 유씨 위패 옆에는 황씨 유골함이 나란히 놓였다. 유창수·황정숙씨 부부가 이렇게 한 공간에서 함께하는 것은 75년 만이다.
부친 유창수씨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돌연 행방불명됐다. 유씨는 경기 파주의 한 부대에서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부대가 포위된 후 차를 타고 피란을 가던 중 폭격을 맞았다. 23세 나이로 행방불명 처리된 유씨는 그해 11월 25일 전사 판정을 받았다. 아내 황씨가 18살 때 겪은 일이다. 이후 황씨는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 아들을 홀로 길러내야 했다.
아들 유씨와 모친 황씨 사이에서 부친의 죽음은 ‘금기어’였다. 황씨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남편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들 유씨에게만 종종 “아버지는 언젠가 돌아오신다”고 말했다. 남편이 전사 판정을 받았지만 유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씨는 평생 ‘남편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5일 오후 유경희(사진 왼쪽)가 아내 손대영씨와 함께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위패와 어머니 유골함을 찾았다. /장련성 기자
그런 믿음으로 황씨는 전사 판정을 받은 남편 제사를 수십 년간 치르지 않았다. 사갑(질병·사고로 일찍 죽은 이가 생존했을 때 맞았을 환갑)이 지나고 난 1987년부터는 매년 음력 11월 18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살아 생전 마지막으로 남편을 본 날을 제삿날로 삼았다. 황씨가 남편이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생전 남편과 살았던 경기 용인에서만 황씨는 평생을 살았다. 남편이 돌아온다면 전쟁 전 황씨와 함께 살았던 신혼집이 있는 용인을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2023년 여름, 아들 유씨는 부친 위패가 현충원에 모셔져 있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국방부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국방부는 1년 뒤 유씨에게 “유해는 못 찾았지만, 위패를 현충원에 모시고 있다”고 알려왔다.
국방부 연락이 온 바로 다음 날, 유씨는 모친 황씨를 모시고 곧장 현충원을 찾았다. 남편 위패 앞에서 황씨는 한참을 통곡했다. 바닥에 드러누워 발버둥치기도 했다. 황씨 며느리이자 아들 유씨 아내인 손씨는 “평소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곧으셨던 어머니가 그렇게 무너지신 건 처음 봤다”고 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마음속에서 보내지 못하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황씨는 지난달 남편과 비로소 한 공간에 머무르게 됐다. 뇌출혈로 사망한 황씨 유골함이 남편 위패가 있는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것이다. 유씨는 “어머니께 생전 ‘돌아가시면 아버지와 같이 모시겠다’고 하니 굉장히 좋아하셨다”며 “75년 만에 두 분이 함께 만났으니, 그동안 힘들게 사셨던 것 모두 잊고 편안히 잠드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라고 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people/2025/06/07/D5DSYESE5RBVXI7IPE42TBWF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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