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성' 빚 탕감은 이제 그만, 원칙이 필요하다
이군희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 2025.07.08.
소규모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의 채권이 아직도 장부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폐기 규정이 없어서 임의로 소각하면 배임이 되기 때문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채무자가 30년 가까이 추심의 그림자 아래에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성공한 기업인들조차 외환 위기 시절을 “죽음 같은 나락”이라고 회상한다. 환경이 극단적으로 악화될 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경험담은 우리가 채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실패 후에도 재기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채무 탕감 논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정권마다 나오는 일회성·선심성 부채 탕감에는 3가지 치명적 문제가 있다. ①안 갚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 ②정치적 결정으로 인한 금융 시스템 불확실성의 확대, ③성실 상환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부작용을 안고 있다.
부채 탕감 정책이 남용되면 건전한 신용 질서는 붕괴된다. 실제로 홍콩은 파산 기준을 완화한 1998년에는 파산 신청이 893건이었지만 2000년에는 5487건으로 폭증했다. 우리 정부의 이번 탕감 조치로 예상되는 수혜자 113만명도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다음 탕감을 기다리며 연체로 버티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해법은 기원전 유대인의 주빌리(Jubilee)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7년×7주기를 지난 50번째 해에 토지·부채·노예를 원상 회복해주는 제도다. 부의 편중을 차단하고 재기를 돕는다. 예측 가능한 시장을 만드는 효과도 얻는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도 연체 이후 3~6년이 지나면 추심을 제한하고 7년 뒤 신용 정보를 삭제한다. 반면 한국은 정치 일정에 맞춘 특별사면을 반복한다.
주빌리 제도를 현대 금융 시스템에 맞게 적용할 수는 없을까. 일정 기간(예컨대 7년) 이상 연체된 무담보 소액 채권을 법으로 자동 소각하고 추심을 금지하는 ‘자동 만기 부채 탕감 제도’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이 제도는 도덕적 해이, 채무자 상황에 따른 불평등, 금융회사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3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금융회사는 채권이 언제 소멸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므로 심사 과정에서 미리 고려해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이에 따른 손실 부담은 시장에서 해결되므로 세금 투입은 최소화되면서 금융회사의 부담과 책임은 강화된다.
게다가 채무자 모두에게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므로 전액 또는 부분 탕감이라는 차별이 사라진다. 채무자는 최대 7년 후엔 재기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반복되는 기대 심리→부채 탕감의 악순환이 끊어지면서 포퓰리즘적 정책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다. 장기 부채에 시달리는 가계의 경제적 재활을 일으켜 내수 활성화로도 이어질 수 있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언젠가 또 탕감’이라는 신호는 신용 질서를 무너뜨리고 건전한 금융시장을 왜곡시킨다. 이와 반대로 ‘책임은 미리 반영되고, 빚은 유한(有限)하다’는 철학은 시장을 안정적이고 투명하게 만든다. 금융회사는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시장을 바라볼 수 있으며, 채무자는 실패를 경험 삼아 업그레이드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제는 ‘정치 이벤트성 채무 탕감’을 지양할 때가 됐다. 50년마다 공동체의 새출발을 선언했던 주빌리 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구조를 제도화하는 원칙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을 설계해야 한다.
https://www.chosun.com/opinion/contribution/2025/07/08/QWXCUJCRVNEHFN5BQUKBBAX4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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