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환자 '보수'는 왜 아직도 치료를 거부하는가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2025.06.26.
12·3 비상계엄은 ‘민주주의·헌법·보수 위기’를 불러왔다. 비상계엄이 ‘3중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시각도 꽤 있다. 원인이든 결과든 ‘민주주의 위기’와 ‘헌법 위기’는 ‘조기 대선’ 수술로 급한 위기는 넘겼다. 문제는 ‘보수 위기’다. 중증인데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비상계엄은 ‘1987 체제’ 이후 불가역적이라고 봤던 ‘군사 독재’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2017년 대통령 탄핵’도 평화적으로 이뤄냄으로써 세계의 찬사를 받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국민은 ‘민주주의 위기’를 가장 먼저 수술대에 올렸다.
‘6·3 대선’은 이재명 대통령의 비전·리더십·정책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공고하다는 국민의 강력한 의사 표시다. 비상계엄은 헌법 해석과 헌법기관·국가기관의 권한에 관한 숱한 문제도 드러냈다. ‘헌법 위기’도 개헌과 입법으로 빨리 수술해야 한다.
문제는 수술을 거부하고 있는 국민의힘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①위기에 동의하는가? ②원인은 무엇인가? ③해결책은 있는가? 순으로 풀어야 하는데 국민의힘은 위기감이 전혀 없다. 그게 위기의 핵심이다. 오죽하면 김용태 비대위원장이 “선거에서 이긴 당처럼 행동한다”고 개탄했을까.
대선 직후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원장 강원택)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웹 조사(1500명)에 따르면 보수의 위기를 촉발한 원인으로 ①12·3 비상계엄 사태 36% ②보수 정치인 내분 20% ③윤석열 정부 실정 19% ④강경 보수 노선 11% ⑤대선 후보 단일화 불발 6% ⑥영남 정당으로 축소 2% ⑦기타·모름 7%로 답했다. 보수 정당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①윤석열 전 대통령 등 계엄 관련자 절연 26% ②아스팔트 우파, 극우 유튜버와 단절 15% ③계파 정치 청산 15% ④기득권 정당 이미지 탈피 14% ⑤청년 리더십 발굴 9% ⑥경제 민주화 같은 어젠다 구축 8% ⑦영남 정당 탈피 4% ⑧기타·모름 9%였다.
이 조사에서 주목할 것은 6·3 대선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를 뽑았다는 응답자들은 윤 전 대통령 국정 운영(10점 만점)에 5.3점을 줬다는 사실이다. 특히 잘했다(6~10점)는 응답(47%)이 잘못했다(35%)는 응답보다 12%포인트 많았다. 전체 응답자의 국정 평가 점수가 2.6점이고 잘못했다(0~4점)는 응답(71%)이 잘했다는 응답(19%)을 압도한 것과 비교하면 인식 차가 크다.
국민의힘 위기의 핵심은 ‘민심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정권 초기 친윤 핵심 장제원이 “윤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다”라고 말한 순간 국민의힘은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정당이 됐다. “민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윤심이다”라고 대통령에게 말할 수 있는 당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호남을 포위했던 거대 ‘보수 동맹’이 이젠 거꾸로 ‘대구·경북당’으로 역포위됐다. 민주당은 이젠 김대중의 호남당도 아니고, 노무현·문재인의 PK당도 아니다. 수도권 정당이다. 대선 후보, 당대표, 원내 대표 모두 수도권 기반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부인할 수 없는 ‘대구·경북당’이다. 그 인식 세계에 당이 갇혔다. 오류는 고칠 수 있어도 한계는 넘을 수 없다. 국민의힘에서 혁신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정치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두 방법이 있다. 자기 생각에 맞춰 현실을 바꿀 물리적 힘이 있거나, 아니면 현실에 맞춰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독재하거나 선거를 잘하거나다. 윤석열 대통령은 둘 다 실패했다. 민심 읽는 능력을 잃어버린 국민의힘은 ‘선거 공포증’ 상태다. 선거 포비아의 극단적 행태가 ‘부정선거론’이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 대 ‘탄핵 찬성’, ‘자유 우파 결집’ 대 ‘중도 외연 확장’, ‘당심’ 대 ‘민심’, ‘극우 유튜버’ 대 ‘레거시 미디어’의 노선 대립에서 전자가 당 주류다. 도무지 선거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다. 이 틈을 타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중도 보수’로 전략적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 ‘중도 보수’는 국민의힘을 ‘극우’로 고립시키는 전략이다. 전략 무기는 ‘국민’이다.
레토릭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 성공 시대’,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행복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세계화 흐름을 타고 국가 위상이 올라가고 기업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도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책으로 현실화시키지는 못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그 약점을 파고들고 있다. ‘상법 개정안’ 같은 정책으로 중산층과 서민을 우군으로 만들고 있다.
국민의힘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재명 정부의 독재나 사법·언론 장악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이나 대통령 자리를 감당할 능력과 책임감이 없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윤석열 ‘기저 효과’로 인해 정상적(?) 국정 운영만으로도 지지율을 관리할 수 있다.
전에는 보수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있는 반면 진보는 ‘대한민국과 싸우는 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었다. 이젠 반대다. 윤석열 이후 국민의힘이 법치·선거·언론을 부정하는 세력과 결탁하면서 ‘대한민국과 싸우는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서비스업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고객이 갖기를 원하나 자기는 만들 수 없는 것’을 파는 것이다. 수요 측면에서 고객이 간절하게 갖고 싶고, 공급 측면에서 ‘Only One’이나 ‘Number One’이라면 높은 가격으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국민의힘은 ‘찍고 싶은’ 정당이 아니라 (마지못해) ‘찍어 주는’ 정당이다. 실력·품격·헌신 같은 보수의 상징 자본을 탕진했다. 구매할 매력이 없다.
민주당은 마침내 한국 정치의 주류가 됐다. 1905년·1945년·1985년·2025년 40년마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우리 운명을 흔들어 놓았다. 1905년 러·일 전쟁은 러시아에 의존하던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45년 미국과 소련은 독일과 일본을 항복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겪었다. 1985년 소련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1988년 ‘신베오그라드 선언’으로 ‘제한 주권론’으로 알려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사회주의) 제한 주권론’은 ‘(소련) 제한 방어론’으로 대체됐다. 2025년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판) 제한 방어’ 독트린을 선언했다. 역사적 변곡점에 우리의 운명을 가를 전략적 키를 이번에는 국민이 민주당에 맡겼다. 보수는 신뢰를 잃었다.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6/26/ASFM2HWXANAIVNZX37BDPV57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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