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바로 조선의 국기구나!" 까까머리 학생들은 목 놓아 울었다
[우리들의 해방 일지] [上] 10대들이 맞이한 광복의 날
오주비 기자 김민기 기자 2025.08.15.
일제 치하에 태어난 10대들에게 ‘해방 조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1946년부터 1950년 사이 발간된 학교 교지 18권을 확보해 80년 전 ‘해방일지’를 소개한다. 해방 당시 10대들이 느꼈던 기쁨과 환희,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과 각오를 3회에 걸쳐 정리했다. 그들은 어떤 나라를 꿈꿨고, 그 염원은 지금 얼마나 이뤄졌나.
“아, 저게 바로 조선의 국기(國旗)다. 우리는 국기를 되찾았고, 우리의 말과 민족 동포를 찾았다. 우리 민족은 다 감격에 목메어 휘날리는 조국의 국기 아래 울고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서울 양정중(현 양정중·양정고)에 재학 중이었던 이동준군은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 있었다. 일제의 강제 동원을 피해 서울을 떠나 고향에 있던 중 광복을 맞았다. 마산 시내 곳곳엔 태극기가 내걸리기 시작했다. 거리에 나온 이군은 극장 ‘공락관’에 높이 게양된 태극기를 봤다. 태극기를 보며 아무 말도 없이 서서 눈물을 흘리는 시민도 있었다. 거리에는 ‘독립 만세’라고 적힌 전단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는 이듬해 발행한 양정중 교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국기를 모르고 자라왔다. 조선 사람이면서도 참다운 조선을 알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하고 자랐다. 나는 이날의 감격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고, 저 깃발 밑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전력을 다해 나아갈 것이다.”

1945년 8월 해방 소식을 들은 청년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와 있는 모습을 담은 옛 흑백 사진을 영상으로 구현했다. SK텔레콤의 AI 이미지 복원 기술 ‘슈퍼노바(SUPERNOVA)’와 ICT 기술을 통해 1940년대 흑백 사진을 고화질 컬러 이미지로 전환했다./조선일보 DB
◇“신(新)조선 국가 건설에 작은 힘 되자"
경복중(현재 서울 경복고)은 해방 이후 1946년 우리말로 첫 ‘교우회지’를 발간했다. 학생들은 해방의 기쁨에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국 건립에 이바지하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3학년 정재원군은 “봄이 왔다. 건국의 봄이 왔다. 오랫동안 침묵의 생활에서 해방되어 명랑 활발하게 날뛰는 건국의 봄이 찾아왔다. 이러한 좋은 시기에 우리들은 우리 학생의 의무인 공부에 한층 힘써서 신(新)조선 국가 건설에 작은 힘이 되고 세계 선진국 문화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절차탁마(切磋琢磨), 용감하게 매진하자”고 썼다. 열심히 공부해 민족에 도움이 되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경복중 1학년 김동주군은 “국가의 주석(柱石)이 되겠다“고 했다. ”조선 평화 후 처음 아름다운 봄이 돌아왔다. 북악산 밑에서 장래의 국가의 주석 되라고 하는 대지를 가슴에 품고 일심정력으로 공부하는 일천 명의 경복생도들에게도 봄이 돌아왔다. 나는 이 봄날을 고맙게 받아 조선 민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1946년 경복중 학생들이 해방 후 우리말로 발간한 첫 교지 '교우회지' /경복고
경복중 4학년 장병철군은 마침내 시국을 토론할 자유를 얻은 청춘들의 모습과 애국심을 묘사했다. “경성(지금의 서울), 인천을 오가는 5시 18분발 인천행 열차. 청춘의 봄을 실은 통학생 전용차.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책을 읽으며, 이야기도 하면서 웃음 짓는 동무들. 그 옆에서는 각모(角帽)의 대학생들이 현재 조선 시국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 모습이야말로 청춘의 기쁨을 갖고 건국도상에 있는 학도의 아름다운 환경이다. 나는 대학생들의 토론 내용을 듣고 싶어 가까이 갔다. 그들은 점점 흥분해갔다. ‘우리 학도는 우리의 힘, 청춘의 힘으로 영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를 찾자’고 부르짖고 있었다. 듣고 있던 학생들의 눈에서는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다. 조선의 완전한 독립은 우리 청년 학도의 양 어깨에 있다. 청춘을 실은 열차가 인천으로 맥진(驀進·기운차게 나아감)한다. 청춘의 조선이 청춘의 독립선(線)으로 맥진하는 것이다.”
◇“일장기 대신 태극기, 기미가요 대신 동해물과 백두산이”
학생들은 ‘우리말’ ‘우리 이름’을 되찾은 데 감격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서울 양정중 4학년 이상규군은 1946년 ‘해방 기념 문집’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면서도 우리말을 못 쓰고, 우리 이름을 못 부르고, 우리의 공부도 못 했던 것이다. 8월 15일은 우리의 깊은 바람을 한순간에 풀어주었다. 희망 없이 왜놈 지휘 밑에서 갖은 고생을 다한 우리의 기쁨과 감격이란! 우리는 마음 놓고 우리말을 쓰고, 글을 배우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동포들아! 나를 버리고 건국 대업에 이바지하자!”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당시 경남고등여학교(현 경남여고) 교장은 동창회지에 “일본 냄새 나는 교명 ‘항고여’를 ‘경남고여’로 고치며 한글로 교명을 가슴에 새겨 놓았다. 일본 글과 일본 말을 멀리 쫓아버렸다. 꿈에도 생각 못 하던 태극기를 높이 달고 애국가를 부르니 눈물이 샘솟듯 솟아난다”고 썼다.
학생들은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등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에 대해 마음껏 글을 쓰고 말할 수 있게 된 자유에 대해서도 감격했다. 광주공립공업중학교(현 광주공고)를 다니던 김기섭은 해방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때의 기쁨과 즐거움 자유로움은 천지를 뒤흔든 기세였다. 누가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고 막을 사람도 없었다. ‘꿈이면은 깨지 말아다오’까지 빌었던 것이다. 일장기 대신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기미가요 대신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귀청을 울리고, 죽도 없어 배고파하던 사람들이 술을 빚으니 소돼지를 잡느니 노래를 부르고 꽹과리를 치느니 하는 야단법석이 어디 또 있으며 언제 또 보았더냐. 참으로 장관이었다.”

1947년 개성 송도중 학생들이 발간한 교지 '송우' /참빛아카이브
1947년 개성 송도중(현 인천 송도고) 1학년 조덕환은 ‘해방’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기쁨을 표현했다. “잊으랴 잊을 소냐 8월 15일 / 조선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 / 해방의 종소리 뎅- 뎅- 뎅-/ 눈물로 맞이하던 기쁨의 그날 / 집집마다 태극기 높이 걸고서 / 늙은이나 젊은이나 목이 쉬도록 / 씩씩하게 만세 불렀죠 / 그날 밤 다 같이 태극기 들고 / 거리 거리 골목 골목 씩씩한 얼굴 / 장하구나 용감하다 삼천만 겨레 / 무궁화 이 동산에 새싹이 트고 / 기다리고 기다렸던 해방의 그날.”
경복중 4학년 최한형은 해방 후에야 ‘무궁화’가 국화임을 알고 무궁화 예찬 글을 남겼다. “남의 덕을 조금도 입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 나가려는 그 무궁화! 그 얼마나 성스러운 나무가 아니냐! 남의 양분을 뺏어먹고 사는 ‘겨우살이’와 같이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힘으로 살아 나가려는 것이 좋고, 꽃도 ‘장미꽃’과 같이 화려하지는 못하나 부드럽고 순진한 맛이 있어 좋고, 피었다 하면 눈이 날리듯이 확 져버리는 ‘벚꽃’과 같이 성미가 급하지 않고, 성인(聖人)과 같이 묵직하게 보이고 적당한 시간에 점잖게 ‘툭’ 떨어져 버리는 것도 좋고, 뿌리를 널리 뻗치고 그 씨를 퍼트리는 것이 마치 우리 민족의 세계 진출을 의미하는 듯하여 좋다.”

현재의 동산중·동산고가 1946년 미군정 당시 학교명을 ‘동산중’으로 고치며 현판을 달고 있는 모습. SK텔레콤의 AI 이미지 복원 기술 ‘슈퍼노바(SUPERNOVA)’와 ICT 기술을 통해 1940년대 흑백 사진을 고화질 컬러 이미지로 전환했다./동산고 제공
◇“조국 해방은 치열한 항일 운동 덕분”
당시 학생들은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의 날을 맞았지만, 우리 민족 스스로 치열하게 싸운 독립 투쟁의 역사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양정중 4학년 유진석군은 “우리 민족의 열렬한 투쟁이 없었다면 해방은 꿈에도 바라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보라! 60만 희생으로 싸운 3·1운동. 해외의 눈보라와 서리 속에서, 광대한 만주 평야에서, 태평양 건너에서 일생을 바친 여러 혁명 투사들. 일본인에게 짓밟혀, 쓰라린 철창 생활을 매일 일삼으며 운동을 계속해 온 국내 전사들의 투쟁. 어찌 (광복을) 연합국의 선물로만 생각하고 이런 눈물 겨운 사실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그렇다면 왜 혁명가들은 피와 땀을 흘려가며 투쟁하였는가. 그들이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사랑이 없이는 자신을 희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해방은 이런 요구 없는 사랑의 힘으로 획득한 것이란 걸 명심하여야 한다.” 양정중 3학년 백상기군도 “비록 연합군 전투의 덕이었다고 할지라도, (해방은) 우리 동포가 36년간 자기를 희생하고 갖은 고난을 겪으며 때로 닥쳐오는 유혹과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투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36년 만에 서광이 비치는 이때, 자기 마음 가운데에 있는 모든 불순한 마음을 극복하고 극기(克己)한 민족이 돼야 한다“고 했다.

1945년 10월 부산의 한 학교에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다. 아침조회 시간에 도열한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SK텔레콤의 AI 이미지 복원 기술 ‘슈퍼노바(SUPERNOVA)’와 ICT 기술을 통해 1940년대 흑백 사진을 고화질 컬러 이미지로 전환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학생들의 글 곳곳에는 조국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 있다. 경복중 2학년 김종덕군은 1946년 3월 26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의 36주기 추도회에 참석한 뒤 “안중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해서 우리나라를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썼다. 동급생 김철규군도 “만세삼창을 전력을 다해 불렀다. 안 선생님이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할 때처럼 흉내를 내며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젊은 학생들에 대한 어른들의 기대도 컸다. 배재중이 해방 후 첫 발행한 교지(1949년 6월, 18호)에는 그해 2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모교를 찾아 강연한 내용이 실렸다. “정부가 통상도 하고 모든 국제 외교를 다 도맡아서 한다고만 생각하면 큰 오해요. 우리는 힘을 많이 써야 할 때가 되었소. 우리 국민과 학생이 나서서 1촌 1척의 땅이 다 우리 것으로 강토와 국권을 위하여 싸워야 하겠소.”
취재·자료 수집 어떻게 했나
본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후 학생들이 남긴 글과 사진을 찾기 위해 전국 중·고교 가운데 1945년 이전 개교한 150여 곳과 접촉했다. 대부분 학교는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때 폭격 등으로 해방 전후 학생 기록을 모두 소실한 상태였다. 이에 학교 총동창회, 지자체 박물관, 민간 근현대사 연구자들로 범위를 넓혀 취재했다. 그 결과 경복중·양정중·배재중·송도중·무학여고·광주공립공업중 등 16개 학교가 1946년부터 1950년 사이 발행한 교지(校紙) 18권을 찾았다. 광복을 맞은 1945년도 교지를 갖고 있는 곳은 없었다. 당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며 학교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교지는 각각 50~100쪽 분량이다. 대부분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고, 한글 맞춤법도 지금과 다소 달랐다. 이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정책아카이브연구소에 의뢰해, 교지 내용을 현대식으로 번역했다. 작업에 참여한 김우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해방 전후 우리나라의 중고교생들은 현재 대학생 수준의 엘리트층이었다”면서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아닌 평범한 학생들이 바라본 해방 직후 조국에 대한 인식이 자세하게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진=박대권 교육정책아카이브연구소장, 김우영 교육학 교수, 박수환(서울대 교육학 박사과정), 김수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석사과정), 김현주(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 석사과정), 허지훈(한국교원대 교육학 석사과정)
https://www.chosun.com/national/education/2025/08/16/MYUIYKCYKRHNTALBCPCKRBJF5Q/
“저게 바로 조선의 국기구나!” 까까머리 학생들은 목 놓아 울었다
저게 바로 조선의 국기구나 까까머리 학생들은 목 놓아 울었다 우리들의 해방 일지 上 10대들이 맞이한 광복의 날
www.chosun.com
***************
광복 당시 문맹률 78%… 중학교만 가도 엘리트 대우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2025.08.15.
1945년 광복 당시의 ‘중학생’은 지금의 중고등학생 위상과는 크게 달랐다. 중학교만 다녀도 지식인으로 대우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중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인 현재와는 무척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왜 그랬을까?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의 15세 이상 인구 중 중학교 졸업자의 비율은 1.62%에 불과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자가 11.77%였으니 국졸자 중 13.76%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학교 졸업자는 0.16%, 대졸자는 0.05%였다. 우리나라의 대졸자 비율이 2023년 25~34세 기준 69.7%인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1945년에는 제4차 조선교육령(1943)으로 인해 중학교(1938년 이전엔 고등보통학교·고보) 과정은 5년에서 4년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던 것은 일제의 교육 차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고급 인력을 많이 양성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에는 고등학교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 대학에 유학을 가려는 사람은 조선에서 전문학교를 나오거나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일본 대학에 가서도 본과가 아니라 전문부나 예과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1945년 이전엔 중학생이 몇 명 되지도 않았던 데다가, 중학교만 나와도 사회에서 상당한 지식인으로 대접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1945년 문맹률이 78%에 달하던 상황에서 글을 읽을 줄 알고 지식과 교양을 갖춘 중학생은 인재로 대우받기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중학생(고보생)의 지적 수준이나 사회적 역량도 뛰어났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광주고보 학생들은 조직적 학생 운동을 이끌었다. 일제 치하에서 학교마다 독서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주도해 사회 각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5/08/16/5MR5AJE3AZFDRBFDY72KZY6ENY/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폭력·가정폭력·아동학대를 당한 이들을 대변하는 ‘피해자 변호사’ 서혜진... 안희정·고은·박원순에 당한 피해자들 곁에 이 변호사가 있었다 (6) | 2025.08.19 |
|---|---|
| [우리들의 해방 일지] [中] 정치적 분열 비판한 10대들"…수많은 당들이 대가리 터지게 싸움만" 학생들은 통합 촉구했다 (5) | 2025.08.17 |
| "암 투병 엄마 간호·지적장애에도… 사교육 없이 꿈 이뤘죠" - 'EBS 꿈장학생' 대상 한서영씨, 최우수상 유재민씨 (8) | 2025.08.16 |
| 서체 디자인의 허브서 '한글'로 인정받다 - 김민종 서체 디자이너 인터뷰 (9) | 2025.08.14 |
| 아내 장례 때도 공연한 신구... "여태껏 산 건 다 남의 덕"/89세 배우 '고도를 기다리며' 139회 공연 끝내 (9) | 2025.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