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5호선 불길 잡은 건, 옆 칸에 있던 시민들
보안 카메라 영상에 담긴 '의인'
구동완 기자 2025.06.04.

지난달 31일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방화 발생 직후 열차 내부에 소방대원들이 진입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내부 시설이 거의 불타지 않았다. 바닥에 시민들이 직접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소화기 3개가 있다. /영등포소방서
지난달 31일 발생한 서울 지하철 5호선 방화 사건 당시 옆 칸에 있던 시민들이 소화기를 들고 불을 초기 진압한 것으로 보안 카메라 영상을 통해 3일 확인됐다. 본지는 서울교통공사의 당시 사고 영상 분석 결과를 입수했다. 이에 따르면 ‘제2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될 뻔한 아찔한 사고를 앞장서서 막은 건 다름 아닌 시민들이었다. 서울교통공사는 이르면 4일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 사고는 31일 오전 8시 43분쯤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을 출발해 마포역 방향으로 달리던 열차 안에서 발생했다. 영상에 따르면 넷째 칸에 타고 있던 원모(68)씨가 객실 바닥에 모자와 양말 등을 놓고 휘발유를 부었다. 이 모습을 본 승객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넷째 칸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원씨는 이후 빈 객차에서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불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22년 전인 2003년 대구 지하철 1호선에선 열차 안 방화로 지하철 12량이 불타고 승객 192명이 숨졌었다. 이후 지자체와 정부는 잇달아 객실 내장재를 불에 잘 타지 않는 난연·불연성 소재로 바꿨다. 이 때문에 1분쯤 뒤 불길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은 타고 있었고, 검은 연기는 차량을 꽉 채웠다.
그런데 바로 옆 칸인 다섯째 칸에 있던 시민 4~5명 가운데 어두운색 옷을 입은 한 남성이 소화기를 들고 앞장서서 불이 난 객차에 뛰어들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불이 붙은 원씨의 가방을 향해 소화액을 분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불길이 순식간에 잡혔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영상에 자세히 잡히지는 않지만, 이 남성 외에도 여러 명이 불을 끄기 위해 소화기를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대피 안내 방송을 마친 기관사가 도착했을 때 현장에선 소화기 3대가 발견됐다. 적어도 3명의 시민이 소화기를 가지고 불을 끄려고 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시민들은 이후 기관사와 함께 잔불을 완전히 끈 것으로 확인됐다. 기관사 A씨는 “열차에 화재가 난 것 같으니, 신속히 이동하고 대피해 달라“는 내용의 두 차례 안내 방송을 한 뒤 화재가 난 차량으로 뛰어갔다. 사고 직후 면담 조사에서 그는 “질식해 죽는 건 아닐까 정말 두려웠지만, 육안으로 화재 현장을 확인하고 진압해야 한다는 생각에 재빨리 달려갔다”고 진술했다.
당시 열차에는 승객 420여 명이 타고 있어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발 빠른 대처로 사망∙중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시민들은 불이 나자 당시 열차의 출입문 총 64개 중 절반 이상인 약 60%를 직접 연 것으로 확인됐다. 비상 개폐 장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시민들이 앞장서서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방 당국과 서울교통공사는 화재를 초기 진압한 시민들의 신원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소방 관계자는 “당시 승객들을 상대로 ‘의인’들이 누군지 수소문하고 있다”며 “가장 먼저 불을 끄는 데 앞장섰던 중년 남성을 특히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지난 2일 원씨를 구속했다. 원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혼 소송 결과에 불만이 있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번 방화로 약 3억3000만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서울교통공사는 원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다.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5/06/04/NMDZGJHBORGPDHHZQYIITOUG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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